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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자, 그게 더 건강하니까마음 2021. 2. 3. 22:32
퇴근하는 나를 데리러 오던 R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눈이 엄청 와!’ 과연, 건물을 나와보니 굵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필 후드가 달리지 않은 옷을 입은 날이라 R을 방패삼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골목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갓 하늘에서 내려온, 뽀얗고 깨끗한 눈이 내 발 밑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눈을 감고 천천히 걸어보았다. 뽀득, 뽀드득, 이럴 때만 들을 수 있는 귀한 소리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생각해보니 밖에서 이렇게 느린 속도로 걸어본 건, 그것도 눈을 감고 해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지켜야 할 시간 약속이 없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여유니까 그럴 법 하다. 오늘 한껏 낭만을 만끽했던 길은 회사를 다니던 시절, 새벽 6시 40분에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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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혹은 월급을)일 2021. 1. 29. 22:53
. 편식을 좋아하는 아이 입맛답게, 내가 좋아하는 이 책 역시 그림책이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끝없이 올라가기만 하고 싶어하는 애벌레들은 바보다’ 정도가 아닐까. 서로를 밟아가면 올라선 거대한 애벌레 탑 꼭대기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고, 바닥으로 내려와 번데기가 되는 걸 선택한 주인공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었다.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알았으니, 나비가 탑을 넘어 높이 날아갔을리는 없다. 대신 더 넓게, 낮지만 더 먼 곳으로 날아갔을거다. (난 그렇게 믿고 싶다. 탑을 앞질러 올라가봤더니 금은보화가 있었다는, 사실 존버만이 답이었다는 그런 교훈은 얻고 싶지 않으니까.) 이 복잡하고 어려운 세계를 수박을 쪼개듯 딱 두 개로 나누고 싶을 때, 이 책을 떠올린다. 내가 어떻게든 남아보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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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직원도 아닌, 자영업자일 2021. 1. 28. 17:02
나는 프리랜서이자 자영업자다. 근무형태만 보면 외주를 받아 ‘프리’하게 일하는 프리랜서지만, 고용형태를 보면 self-employed니까. 그리고 고용주로부터 돈을 받아 생활하는 근로소득자와는 다르게, 자영업자는 매달 일정한 돈이 들어올 거라고 보여줄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1년에 한 번 뿐인 종합소득세 신고 결과를 들이미는 것인데, 5월에 신고하기 전까지는(정확히 말하면 신고 결과가 나오는 7월 즈음까지는) 전년도 소득조차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올해 소득으로 대출도 받고 신용카드도 만들려면 내년 중순까지 기다려야 한다. (올해 소득이 그러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전세대출 대환 상담을 하러 은행에 갔을때 들은 얘기는 더 아팠다. 근로소득자는 근로계약 기간 내 매월 소득이 발생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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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지 않는 신에게, 기도합니다gita 2021. 1. 19. 03:08
할머니의 가슴이 헐떡거리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산소호흡기가 공기를 불어넣는 것인지, 마지막 숨은 원래 저렇게 세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내 등을 떠밀며 인사드리라고 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쁜 호흡과 흐느낌으로 소란한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주님, 할머니를 부디 천국으로 인도해주세요.’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외가 식구들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어쩌다 들어간 중학교도 미션스쿨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은 자라나지 않았다. 분노와 우울에 절어 사는 어머니를 혼자서 견뎌내야 했던 세월 속에 신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게 견딜 수 있는 시련만을 주거나, 무한한 사랑을 베풀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계획이라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