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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리게 걷자, 그게 더 건강하니까
    마음 2021. 2. 3. 22:32

    손이 너무 시렸지만, 도저히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퇴근하는 나를 데리러 오던 R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눈이 엄청 와!’ 과연, 건물을 나와보니 굵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필 후드가 달리지 않은 옷을 입은 날이라 R을 방패삼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골목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갓 하늘에서 내려온, 뽀얗고 깨끗한 눈이 내 발 밑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눈을 감고 천천히 걸어보았다. 뽀득, 뽀드득, 이럴 때만 들을 수 있는 귀한 소리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생각해보니 밖에서 이렇게 느린 속도로 걸어본 건, 그것도 눈을 감고 해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지켜야 할 시간 약속이 없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여유니까 그럴 법 하다. 오늘 한껏 낭만을 만끽했던 길은 회사를 다니던 시절, 새벽 6시 40분에 떠나는 출근 셔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가던 길이기도 했다. 그때는 어떻게든 축지법이라도 부려 일 초라도 아끼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고,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짜증만 더해졌다. 어쩌다 시간이 많은 날에도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느라 바빴다. 내일까지 인도로 보낼 서류 마무리 해야하고, 출근해서 메일 보낸 뒤에 엑셀에 기록해두고...

    그러던 내가 퇴사를 결심한 건 건강하고 싶어서였다. 입사 초반의 설렘이 가신 뒤, 스무 살 때부터 안고 살아온 우울증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서 무슨 약을 지어먹어야 할지도 꿰고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약을 복용하는 첫 몇 달은 지독한 부작용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판국에, 졸음을 불러오고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약을 먹는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난 가난해지지만 동시에 건강해질 수 있는 퇴사를 선택했고, 지금까지도 잘 한 결정이라 믿는다.

     

    파리에 사는 친구가 보내준 엽서. ‘난 행복하기로 결정했다. 그게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 볼테르



    어쩌면 우울증과 평생을 같이 살아가야 할 나에게 있어 건강은, 그리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여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우울의 늪에 빠져들거나,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느리게 가는 것은 낭만적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살기 위해 붙잡고 있어야 하는 구명 조끼다.

    그러기 위해 난 눈이 올 때는 아주 천천히 밟으며 뽀득이는 소리를 만끽해야 한다. 그게 더 건강하니까. 나의 하찮고 소중한 마음이 부서지지 않도록 지킬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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