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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직함의 대가
    마음 2021. 5. 2. 23:43

    여전히 많이 아프다. 우울을 나의 일부로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능통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심장의 바닥부터 생살을 갉아먹히는 밤이면, 난 내 자신을 초연히 사랑하겠다던 결백한 의지를 코를 푼 휴지처럼 구겨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어진다. 내가 무슨 대단한 성자라고 이런 걸 허허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난 나락으로 떨어진 저급한 인간의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외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 걸까. 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나, 아니 하지 않았나. 왜 그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나. 왜 아무도 없었나. 속으로만 지르는 소리는 나의 내면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세포와 내장을 파고든다. 그런 밤에는 방충망을 박살내고 뛰어내리는 상상을 천 번도 더 한다. 이것이 바로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데에 따르는 대가다. 죽음의 그림자 곁에 잡아먹힐듯 다가서야만 그 옆에 서 있는 나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도 한 가지 달라진게 있긴 하다. 예전에는 이런 기분이 마치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예기치 못하게 덮쳤다. (아마도 호르몬의 농간이겠지.) 요즘에는 거기에 더해, 어렴풋하게 나의 의지가 반영된 행동 때문에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기회가 있을 때 나의 가슴을 있는 힘껏 열어젖히고, 들고 나는 모든 힘을 생생히 느끼려고 할 때, 그렇게 내 자신에게 솔직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연스럽게 아픔이 찾아온다. 예를 들어, 며칠 전 R과 함께 본 영화 <더 파더>에서 딸이 자신에게 짐처럼 느껴지는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장면을 봤을 때에 그랬다. 그 특정한 장면을 내가 일부러 보고 싶어 선택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마저 보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난 내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겠구나. 그래도 괜찮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더러운 기분을 일부러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아, 내가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구나, 내가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장면을 마음 편히 보지 못하는구나. 마치 나의 옆에 서서 자신을 지켜본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관찰만 한다. 그러면 그 기분에 처참히 물어뜯기는 과정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물어뜯기는 대상도 나여서 당연히 아프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소파에 앉아 조금 울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과 맞서 싸우고 정복하려 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내려 했더니 그 감정에 오래 머물러있지 않았다. R이 먼저 잠든 새벽이면 항상 그러하듯, 나의 기분을 소상히 적은 편지 하나를 적어두고 침대로 돌아가 잤다. 죽은듯이 푹 잘 수 있었다.

    어제는 내가 뭐든지 다 말하고 보여줄 수 있는 C를 2년 만에 만났다. 얼굴이 피곤해보인다는 말에 그 전날 영화를 보고 겪었던 일을 평범하게 들려주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랑 새벽까지 싸웠어. 그러기 며칠 전에는 아버지 생신이라 가족 모임을 했어서, 더욱 진이 빠지기도 했고. C는 호들갑을 떨며 위로를 하지도, 그렇다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애써 관심 없는 척을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듣고 담담하게 그랬구나, 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눈빛에 말없이 걱정이 서리는 게 보인다. 그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고 힘있는 위로가 된다. R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C와는 세상 그 누구보다 나의 고통을 더욱 평범하게 나눌 수 있다. 걱정을 시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 무엇이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반응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저 각별한 사람을 위해 자연스럽게 우러낸 마음이라 더욱 귀하다. 연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매일 쬘 수 있는 부드러운 햇빛이라면, 친구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심연의 바닥까지 가라앉았을 때 발견할 수 있도록 가슴 깊숙히 묻어두는 보물과 같다.

    어쩌다보니 얼굴 보기 참 힘든 사람이라 두 배로 귀한 시간이다. 생각이 흐르는대로 아낌없이 쏟아냈고 C도 그러했다. 우리는 딱히 죽을 이유가 없어 그냥 살아지는 삶과, 습관처럼 늘어지는 우정을 끊어내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C의 동기들의 학구열로 인해 좌절된 연애의 기회와, 내년쯤 R과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아빠에게 잘 보이려는 나의 노력에 대해서도 수다를 떨었다. 우리에겐 유독 어렵거나 가벼운 주제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건널목에서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발을 돌리는데,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나의 내면을 주저없이 나누어서 느껴지는 시원함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 일부를 C에게 떼어준 뒤 남는 공허함 같기도 했다. 이 감정이 낯선 걸 보니, 새삼 내가 이 정도로 깊고 편안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게 가까이 와닿는다. 나의 이야기는, C와 같이 드문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척 어려워한다. 거기에 예민한 나의 성격까지 더해지면, 상대방의 반응은 내게 예상치 못한 상처로 돌아온다. 그래서 항상 묻고만 살다가 이렇게 어쩌다 한 번 있는 날에 외출을 할 수 있다. 그 기회가 마치 단비같이 하늘에서 내리는데, 갇혀 살기만 하던 존재에게는 작은 빗방울도 살갗을 뚫는 바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이 나를 마구 때릴 때와는 또 다른 이유로 아프다.

    이 역시 솔직함의 대가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이렇게 순탄치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자신을 마주하기로 한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결심이지만 동시에 첫 걸음에 불과하다. 힘겹게 한 발을 떼어놓은 지금,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은 잘 버티는 것이다. 내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기로 한 대가를 정직하게 치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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