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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라운딩, 현재를 단단히 붙드는 방법
    마음 2021. 2. 11. 22:27

     

     

     


    새벽 몇 시였는지도 모르겠다. 꺽꺽대며 울다가 번쩍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 축축한 얼굴과 베개만 느껴지는데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처럼 엄마에 대한 악몽에 흠뻑 젖었다가 깨면, 온 감각이 무뎌지며 몸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그럴 땐 웅크린 자세로 울음을 다 토해낼 때까지 견디고 또 견뎌내야만 했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 겨우 숨이 잦아들어야만 저지레는 끝이 났다.

    하지만 최근에는 작지만 중요한 행동을 하나 더하기 시작했다. 모든 의지를 짜내서 어떻게든 침대 끝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불을 켜는거다. 주변이 환해지면 익숙한 침실 벽지도, 벽에 걸어둔 고양이 가랜드도, 이불 아래로 삐져나온 발끝도 보인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색깔들을 속으로 되뇌기 시작한다. 벽지의 네모 무늬는 회색, 고양이는 분홍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 인지하는 색이 많아질 수록 호흡이 진정되어 간다. 내 머릿속에 갇혀있는 영겁의 시간을 조금은 줄일 수 있는, 일명 ‘그라운딩’ 기법이다. 

    그라운딩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상담 자리였다. (상담심리센터부터 정신분석 전문의까지 발품을 팔며 여러번 실망했었는데, 트라우마 전문 기관인 이 곳을 알게 된 이후로는 여기에 정착했다.) 케이스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인지행동치료 위주로 진행되었고, 그 일환으로서 배운 그라운딩이 제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라운딩이란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과 거리를 두기 위해 외부로 관심을 돌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숫자를 세거나, 오늘의 일과를 설명하거나, 나와 같이 주변 사물의 색깔을 소리내어 말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즉 현재에 집중하며 과거나 미래로부터 현재를 명확히 분리할 수 있게 된다. 

     

     

    그라운딩 자료에 첫머리에 적혀있는 문구. "어떤 감정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내게 그라운딩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연상될 때마다, 현재가 무뎌지고 고통받던 과거의 그 순간에 갇혀버렸기 때문이었다. R과 동거를 시작하며 사소하게 툴툴대거나 얼굴을 찌뿌리기는 모습만 봐도, 난 어린 시절 목격한 폭발하기 직전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날은 밤을 새워 기절할 때까지 맞았기 때문에 조금만 기미가 보여도 심장이 쿵쿵 울리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의 폭력에 무력히 노출되었던 다섯살, 열두살, 열여덟살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R도 나를 경멸하고 내가 죽길 바란다는 망상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렇게 일상적인 표정 변화 하나만으로도 난 순식간에 무너져 과거에 묶여버렸다.  

    그런 순간에 나를 다시 현재로 돌려놓는 것이 바로 그라운딩이다. 내가 경험하는 감정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회상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걸 인지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는 더 이상 내가 당시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걸 알기 위해, 스스로를 안듯이 양쪽 팔을 토닥이며  ‘괜찮아, 안전해’라고 되뇌는 방법도 더해준다. 이를 반복하며 내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에 1부터 10까지의 점수를 매기고, 시간에 따라 점수가 내려가고 있는지 관찰한다. 호흡이 진정되고 머리가 개운해지면 1이나 2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제서야 난 기억해낼 수 있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걸.

    현재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 문자 그대로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 상식을 부숴버릴 정도로 강한 트라우마도 존재한다. 그것도 내 머릿속에 있어서 어딜 가도 날 따라오고, 거울을 보면 나를 쳐다봤으며, 잠을 청하면 꿈으로 따라들어왔다. 한때는 트라우마가 곧 나라는 일체감에 이 고통을 죽이려면 스스로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도 달고 살았고, 때로는 그라운딩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평생 이 기분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운이 좋은 사람들은 의지로 이겨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피를 뚝뚝 흘리며 겨우 한 걸음 떼자마자 다시 나락으로 밀쳐지는 기분을 아는가?

     

     

    회사 다니던 시절, R은 새벽같이 출근하는 나를 따라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고 셔틀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 사랑이 현재를 살아가게 한다. 동시에 그런 사랑을 누리려면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 서른 해를 채워온 내 자신이 대견하니까 난 계속 살아있을 거다. 인생 첫 이십 년을 지배했던 학대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딩에 대해 알게 된 지 불과 일 년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살아왔으니 그게 아까워서라도 앞으로 살아야 한다. 해가 갈 수록 티끌만큼의 희망이 쌓여간다. 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희망, 악몽을 덜 꿀 수도 있겠다는 희망, 이런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아니, 설령 그런 희망이 다시 사라지더라도 난 계속 살아야만 한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니까, 지금은 그때와 다른 가능성을 가진 ‘현재’니까 말이다. 그걸 잊지 않기 위해 난 그라운딩을 실천한다. 현재를 단단히 붙드는 힘을 키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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