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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사히 설을 보내며
    마음 2021. 2. 14. 23:11


    오늘은 R과 아빠네 집에 다녀왔다. 아빠와 새엄마가 R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인상이 선해보이고, 젓가락질 잘하고, 한식을 주는대로 잘 먹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 이상으로 우리는 깊게 대화하지 않는다. 아니, 그 무엇에 대해서도 우린 깊게 대화하지 않는다. 난 아빠에게 왜 이전에 살던 신축 아파트에서 더 살지 못하고 십년은 더 낡은 것 같은 곳으로 이사했는지 묻지 않는다. 아빠는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 회사 다닐때에 비해 수입이 얼마나 줄었는지, 전세자금대출은 얼마나 갚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런 궁금증은 묻어두고 게장을 언제 담갔는지, R이 생선전을 먹을 줄 아는지 대화만 해도 시간은 금방 간다.

    나의 신경은 온통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부디 오늘 하루를 잘 넘길 수 있도록, 내가 많은 것들을 그만두고 선택한 사업을 어떻게든 인정받도록. 거기에 더해 R을 이쁘게 봐줄 수 있도록 중간 중간 칭찬과 자랑을 섞어가며 쉼없이 통역을 했다. 그렇게 거의 세시간을 내리 대화하고 집을 나서니 진이 쭉 빠진다. 내가 지금 발버둥치는 과정에 손뼉을 치며 칭찬해달라고 세시간짜리 피칭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아빠를 안다. 내가 로스쿨을 갔을 때, 대기업에 붙었을 때 아빠는 얼굴이 환해지며 진짜로 기뻐했다. 지금은 내가 정신줄 붙들고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속으로 백 번 되뇌이고 웃는 얼굴 같았다. 그 표정이 자꾸 생각이 나서 속이 좋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가족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에게는 명절이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차는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제발 지나가길 바라는 시간일거다. 나만 그럴 건 아니지만 그 사실이 딱히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건 모두가 내일 출근을 두려워하지만 난 그저 일하며 이 기분을 잊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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