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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들에게 희망을 (혹은 월급을)
    2021. 1. 29. 22:53

     

    이렇게 보니 나비가 정말 멋지다. 나비를 포기한 애벌레들을 멍청이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 비주얼.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나비가 저런 것도 아니고 애벌레라고 다 못생긴 것도 아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편식을 좋아하는 아이 입맛답게, 내가 좋아하는 이 책 역시 그림책이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끝없이 올라가기만 하고 싶어하는 애벌레들은 바보다’ 정도가 아닐까. 서로를 밟아가면 올라선 거대한 애벌레 탑 꼭대기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고, 바닥으로 내려와 번데기가 되는 걸 선택한 주인공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었다.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알았으니, 나비가 탑을 넘어 높이 날아갔을리는 없다. 대신 더 넓게, 낮지만 더 먼 곳으로 날아갔을거다. (난 그렇게 믿고 싶다. 탑을 앞질러 올라가봤더니 금은보화가 있었다는, 사실 존버만이 답이었다는 그런 교훈은 얻고 싶지 않으니까.)

     

     

    워렌 버핏도 미는 존버, 사실 그게 책의 진짜 교훈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워렌 버핏이 한 말도 아니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세계를 수박을 쪼개듯 딱 두 개로 나누고 싶을 때, 이 책을 떠올린다. 내가 어떻게든 남아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도태되어 포기했던 세계, 소위 말하는 돈 잘 벌고 인정받는 세계 속의 사람들은 다 바보 같은 애벌레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확실히 밟고 밟히며, 당장의 안락을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고 그 안의 사람들이 불쌍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자의로 나선 것도 아니고, 경쟁에서 밀려나버린 패자가 하는 평가가 무슨 객관성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들만의 리그 속 ‘그들’을 돈에 미쳐있는 멍청이들로 묶어버리는 나의 마음에는 그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구질구질한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묻어있다. 리그 속에서 성공한 자들은 이런 같잖은 핑계를 짜낼 필요조차 없는데 말이다.

    번데기에 들어앉아 내일의 생활비를 고민하는 애벌레는 안다. 사실 탑을 기어오르는 애벌레들도 각자의 소중하고 반짝이는 목표가 있다는 걸. 로스쿨을 다니며 만났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머리도 비상하고 엉덩이도 무겁다는 조건이 맞물려 변호사가 된 것이지, 자본주의를 벗겨먹겠다고 이를 갈며 남들을 짓밟는 냉혈한인 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긴 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빅펌 들어가서 돈 잘 벌고 있다.) 마치 탑을 오르는 사람들이 다 악인이 아니듯, 남들이 지향하는 진로만 쏙쏙 피해가는 나만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주머니가 가벼운 애벌레는 멋을 부릴 수 없다. 가끔 이렇게 글을 토하며 이럴 시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 궁시렁거릴 뿐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멍청하게 탑을 오르는 애벌레와 멋진 번데기로만 나눠지지 않는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으니, 내가 가진 조건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최선이다. 난 고귀한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를 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탑을 오를 깜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나마 내 마음이 편한 자리를 찾다보니 여기까지 밀려온 것 뿐이다. 올해 목표를 자아 실현도, 세계 평화도 아닌 ‘월 250만원 이상 안정적 수입’으로 세운 사람이 누구를 속물이라고 욕하겠는가. 내가 지금 해야할 것은 버리고 온 세상을 곱씹는 것이 아니다. 나의 분수에 만족할 수 있게 해주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도 남들보다 느긋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아, 월 250만원도 벌어야 한다.)

     

     

    *모든 이미지 출처는 각 이미지에 걸린 링크로 남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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