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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직히 나는 못해요
    2021. 2. 7. 18:34


    나의 20대는 그야말로 ‘뻥카’를 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겁도 없이 낯선 분야에 발을 쑥쑥 들이밀며 열정과 가능성을 어필했다. 해당 분야에 깊이있는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관심은 엄청 많았고, 비슷한 다른 것들도 잘 했으니 이것도 잘 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거다. 그렇게 스펙만 떼놓고 보면 도저히 합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소개서 한 장으로 로스쿨을 뚫고, 종합상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막상 들어가보니 알 수 있었다. 입시와 취업은 첫 번째 관문일 뿐, 진짜 게임은 들어온 뒤에 시작한다는 걸 말이다. 말빨이 아니라 ‘진짜’ 실력과 적성을 내세워 들어온 경쟁자들이 성큼성큼 나아가는 동안, 난 원서를 넣기 전 했어야 하는 뒤늦은 고민들에 고통받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호된 경험을 통해 배운 건, 사회인에겐 ‘일단 질러봐야 한다’는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거였다. 잠재력과 가능성만으로도 인정받았던 학생 신분을 벗고, 실력으로 승부를 겨뤄야 하는 자리에선 좀 더 신중해야 한다.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나의 평판과 월급이 깎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업의 퀄리티로만 냉정히 평가받는 나의 일은 더 그렇다. 포트폴리오 늘려보겠다고 깜냥 밖의 일을 받았다가는 의뢰인을 실망시킬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별점 테러를 당하거나 분쟁이라도 터지면 정신승리로도 메울 수 없는 데미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값비싼 시행착오를 겪기에 2인 4묘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어깨는 무겁다.



    상당히 보수적인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솔직함은 의외로 환영받는다. 시간 제한이나 경험 부족을 이유로 몇 명의 의뢰인들을 돌려보낸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다시 찾아왔다. 퀄리티에 대한 뚝심이 느껴져서 신뢰가 간다는게 이유였다. 그런 인상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작업을 거절할 때 아무 설명 없이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일거다. 내가 작업을 하는 방식을 설명하며 최소한 n시간 정도가 필요하다는 걸 이해시키고, 대신 현재 시점에서 가능한 모든 피드백을 최선을 다해 드렸다. 무료 상담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오지랖이었지만, 의뢰인의 다급함과 절박함을 알기 때문에 차마 그냥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의도는 거기에 그쳤지만 그게 추가 작업으로 돌아올 줄이야. 팍팍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오랜만에 진심이 통한 것 같아 흐뭇했다.

    가능성에만 기대어 살 수 있던 시절은 지났다.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앞으로도 세상을 뒤집어놓는 도전은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수많은 ‘뻥카’를 치면서 내 능력이 뭔지 확실히 배웠으니, 이젠 그걸 내실있게 키울 차례이기 때문이다. 기깔난 스토리텔링을 통해 꿈도 못 꿀 곳들의 합격을 받아냈던 걸 보면, 지금 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진 솔직히 못하는 게 더 많아도 괜찮다.



    *이미지 출처는 각각 이미지에 링크로 걸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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