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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절
    마음 2021. 12. 21. 02:14

    비가 살갗을 뚫을 듯이 세차게 내리지만 피할 곳이 없다.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한한 벌판에 서서 그 비를 묵묵히 맞는다. 비를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몸을 피할 작은 처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비가 내리는대로 맞으며 선명하게 아파하고 견뎌야 한다.

    새벽에 두 번 거절을 했다. 하나는 크리스마스때 잡혀있던 가족 모임. 다른 하나는 고객의 작업 요청. 원만한 사회생활 내지는 돈과 직결되는 문제지만 내 능력상 도저히 해낼 자신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거절 문구를 길게 쓰고, 계속 읽고, 보내고 바꿀 수도 없는데도 계속 읽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고민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 그렇듯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아는 걸 모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몇 번 더 읽어보다 그게 몇 분 전 나의 최선이었다는 걸 깨닫고 그냥 닫아버렸다.

    비가 계속 온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궃은 장마가 나의 머리를 뚫고 온 몸을 채워버릴 것처럼 내린다. 거기에 흠뻑 젖어있을 때에 난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내 몸 하나 가누기도 버겁다. 거절에 대해 무슨 답이 올지는 내일이나 알 수 있겠지. 나의 얼굴을 핥아주고 몸 위에서 체온을 나누는 고양이에 의존해 오늘 밤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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