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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꾸는 일
    마음 2021. 12. 20. 02:33

    무작정 떠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어디가 되었던 내가 매일 먹고 자는 집만 아니면 됐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한없이 멀리 멀리, 그래봤자 이 작은 나라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남쪽 끝자락에 가서 며칠을 보내야만 마치 액땜을 한 듯 남은 일 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어딜 가도 나라는 사람은 날 자꾸만 따라왔고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나에게 한 번도 편안함을 안겨주지 못한 그 장소와 의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웃기지만 그렇게 멀리 가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집이 그립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익숙하고 나를 맞아주는 고양이들이 지키고 있는 그 집을. 그러고 막상 집에 가면 바닥을 구르는 먼지와 쌓인 설거지거리와 의자를 삼켜버린 옷더미를 보고 다시 가출하고 싶어진다. 끝나지 않는 루프의 반복.

    하지만 나의 삶의 공간, 내가 지고 살아가는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면서 세상 어디에서 행복을 찾겠나. 정리정돈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나와 비슷한 병을 앓는 사람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그녀는 정리를 시작하기 전 항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집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버리기로 결정한 물건들을 보며 망설여지면 그 물건에게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말하며 이별하라고 한다. 그걸 보며 난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공간, 내가 소유한 물건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요리를 시작한 이유도 비슷하다. 허기를 가라앉힐 음식을 아무거나 골라 입에 우겨넣고 있으면 때로는 내 자신이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슬슬 나이가 들며 먹는 음식이 고스란히 나의 피부에, 뱃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싫어도 계속 안고 가야하는 존재인데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걸까. 그래서 내 입맛에 맞으면서도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적당히 먹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어렸을 때에는 더욱 멀리 가서 더욱 큰 일을 하고 세상과 우주를 집어삼키고 싶었는데, 밀리고 밀려와 결국 나는 내가 생활하는 몇 뼘의 공간과 씨름하는 인간이 되었다. 마음이 공허할 수록 주변부터 차곡차곡 채우고 가꿔야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 지금까지 내가 나돌던 게 사실 결핍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걸 깨닫고 나니 전처럼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코로나도 큰 도움이 됐네.)

    공간을, 소유를, 관계를 잘 가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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