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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하지 않아
    gita 2021. 12. 1. 18:45

     

    1. 달이 넘어갈 때마다 매번 하는 소리지만 12월은 그 무게가 다르다. 2021년의 마지막 달이라니. 와 나이 앞자리가 바꼈네, 이렇게 30대가 시작되는 건가-하는 생각을 최근까지도 하고 있었는데 이젠 다른 일로 놀라야 한다. 내가 서른 하나라니! 곧 있으면 만 나이는 20대라고 우길 수도 없다.

     

    2. 나이를 먹으며 '당연하지'라는 말을 잘 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당연한 이치는 물리 법칙 말고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죽었다 깨어나도 포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 대수롭지 않게 놓아주고, 나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된 사람들도 막상 알아가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던 양면이 있고 앞과 뒤를 모두 알면 '이건 이런 거야' '저건 저게 맞아'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선생님께서 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호불호가 강한 학생'이라고 적어주셨었는데, 요즘 나를 만나면 뭐라고 하실까? (한편으로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 타협하지 않고 굴러가는 걸 보면서 '여전하네'라고 말씀하실 것 같기도 하다.)

     

    3. 세상에 틀린 건 없지만 다름은 많다. 그 차이를 마냥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무리해서 긍정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이 삶의 방식에 대해 한때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설득해서 그걸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누가 묻지 않아도 나 주4일 밖에 일하지 않는다고, 근데 돈벌이도 꽤 만족스러워서 회사 생각 하나도 나지 않는다고 떠들어댔었지.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떠벌리고 다닌 건, 내 자신이 나의 선택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스스로 만족스러운지 잘 모르겠으니 주변 사람의 인정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주변 사람들과 공통점이 많지 않고, 나를 떠나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서로 너무도 다른 존재이고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른 선택을 한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가진 걸 부러워하지도, 질투하지도 혹은 폄하하지도 않는다.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 '맞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어쩔 수 없네.'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다른 걸 한다.

     

    4. 이렇게 적다보니 나의 타고난 파이터 기질과는 전혀 다른, 아주 온순한 인간처럼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 같아 덧붙인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게 꼭 무심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놓이지 않은 상대방의 상황을 헤아리고, 혹여나 상처를 주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래가 거의 없었던 후배가 대뜸 고민 상담을 하고 싶다며 연락이 와서 걔도 자퇴하거나 퇴사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친구 때문에 불편한 상황에 대한 고민이였다. 거기까지만 듣고는 '친한 친구한테 토로할 만한 문제를 왜 이름만 아는 사람인 나한테 가지고 왔지?' 싶었다. 근데 알고 보니, 몇 년 전 동아리 행사에서 어떤 선배가 농담이랍시고 '어휴 너 게이냐!'라고 했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정색하면서 '선배 그런 말 농담처럼 하지 마세요'라고 했던 걸 그 친구가 기억하고 있었다. 열 살 넘게 많은 선배였는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말을 반사적으로 하는 게 너무 인상 깊었다고, 그런 나라면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뭐라도 말을 할 것 같은데 내 의견이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한다. 내가 그때 그랬다는 것도 잊고 있었지만,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왠지 내 성격상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옳고 그른 문제로 머리 깨지게 언쟁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정체성을 공격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말은 참을 수 없다. 그걸 어쩔 수 없는 차이라고 묻어버리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주변 분위기나 상대방의 당황한 표정 같은 걸 잘 못 읽는 나의 무심함이 합쳐져서 그 사단이 났던 것 같다.

     

    5. 글은 멋있게 썼지만 정작 후배에게는 조언을 하기에 조심스러웠다. 사건의 당사자도 제대로 선택을 할 수 없는 문제인데 주변 사람이 뭘 알겠나.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언행을 했을 때에 그게 예기치 못한 결과로 돌아올까봐 누구나 걱정을 하는 것 같다. (그 후배는 친구와 함께 속해있는 조직이 본인 때문에 폭발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발화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말을 하는 것 뿐이다. 그 말이 나의 입을 떠나 상대방에게 도달했을 때 어떤 반응으로 돌아올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던져서는 안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시도를 했다면 그 뒤의 사건은 그냥 일어나도록 둬야만 한다. 만약 그런 언쟁 하나 때문에 와해될 조직이라면 애초부터 그다지 건강하지도 않았다는 반증이겠지,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의 문제는 그 사람의 엄마도 할아버지도 못 고칠텐데 뭐, 이 정도의 합리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제3자의 입장이라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거 겠지만.) '너는 그렇구나. 나는 아니야. 너가 날 이해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6. 비겁한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논쟁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것도 싫다. 각자의 모습을 존중하면서, 때로는 건강한 거리를 두지만 또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말하기를 서슴치 않으면서, 나의 말에 책임을 지되 그 결과를 필요 이상으로 통제하려고 들지는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쉬울 리 없지. 지금은 내가 사람들을 만날 일이 별로 없어 이렇게 쉽게 몇 마디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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