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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ta 2021. 11. 6. 02:15


    해방촌 나들이를 다녀왔다. 내 손으로 만든 조끼를 걸치고, 좋아하는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고, 남산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 후암동까지 천천히 걸었다. 도중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멈춰서 가만히 살펴보고 또 사진을 찍었다. 우연히 고즈넉한 카페를 찾아 잠시 뜨개질을 하며 쉬고, 약속된 서점에 가서 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돌아왔다. 돌아보면 여유롭고 느긋한 하루였는데 집에 도착해서는 날카로운 마음이 주체되지 않아 늦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안다. 글을 쓰는 일은 내 자신에게 잔뜩 몰두해야 하는 일이라 진이 빠진다. 오늘처럼 독자들이 예정되어 있고, 또 타이트한 시간 제한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 내가 참여한 행사는 외로움과 관련된 랜덤한 주제에 대해 즉석에서 글을 쓴 뒤 모아서 책자를 만들고 일부 작품을 뽑아 서점에 전시하는 프로젝트인데, 내 글이 뽑혀서 걸리기를 바라는 동시에 또 절대 그럴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 사이에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시선을 의식해 검열하는 글은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다. 꾸역꾸역 써서 전시한 글이 최소한 내 마음에는 들기를 바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풀어내는 쪽을 선택했다. 이제 일주일 동안 없던 일인 척 살다가 다음주 즈음 연락을 받고 같은 서점에 가서 글이 걸린 걸 보고 쪽팔려하던, 아니면 없는 걸 보고 실망하던 뭐라도 느끼고 돌아오면 되겠다.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을 관통하는 일관적인 주제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하도 많이 시도해보고 실패했어서 사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블로그에 나름대로 위트 있는 제목을 달아 구분해 둔 카테고리가 그 시도의 일환이었다. 대충 자퇴하고 프리랜서로 자립해서 살아가는 이야기, 국제연애와 결혼, 그리고 나의 평생 반려질병 우울증으로 나누어 쓰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정보와 교훈을 전달하려는 어색한 글들이 되어버려서 다 닫아버렸다. 일단 지금 계획하고 있는 건 최근 유입된 독자분들께서 궁금해하실 법한 나의 다이내믹 커리어 전환기. 그리고 최근 나의 관심사인, 내가 소유하는 공간과 물건과 보다 건강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 대한 기록. 마지막으로는 다음주부터 시작할 예정인, 프리랜서 자조모임을 통해 얻게 될 나의 일과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 정도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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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퍼스널 브랜딩이 대세라 내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키워드를 뽑고 그걸 중심으로 콘텐츠를 큐레이션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자주 했는데, 무려 책까지 돈 주고 사서 읽은 뒤에도 별 수완이 없었다는 건 아직 나도 내 색깔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정립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프리랜서의 커리어 패스는 각자의 색깔과 속도가 너무도 다양하고(그만큼 내가 지향하는 롤모델이나 선례를 찾기 어려운 게 단점이지만..) 난 이제 겨우 일 년을 넘긴 만큼, 아직 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임시로 시작한 일을 자립이 가능할 정도로 키웠다는 것 만으로도 이번 일 년은 충분히 알차게 보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느린 질적 성장이, 그리고 소박하지만 건강한 삶이 맞다는 걸 배웠다는 사실이 아주 소중하다. 내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거나 혹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지, 무엇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많은 시간을 쏟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아주 단순하게 정리되는 ‘적게 벌고 자유를 누리자’ ‘성장에 집착하지 말자’는 슬로건은 막상 실천하다보니 그 안에 수많은 갈등과 모순이 숨어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주변 지인들의 평균적인 직업과 연봉 규모를 전해듣다보면 생각보다 속이 쓰릴 수도 있다는 것, 그 정도 버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관심사를 논할 때 나는 끼고 싶지도 않고 한편으로 낄 수도 없다는 것, 신용카드도 만들 수 없고 대출도 받을 수 없어 내가 원하는 도시에서 살 선택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대기업에 다니며 내가 느꼈던 공허함이나 존재론적 회의는, 어떻게 보면 경제적인 안전망에 기댄 상태에서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퇴사의 무게를 더듬어 가늠해보는 정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진짜 퇴사를 하고 지금까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소득 수준이나 직장을 다시 가질 가능성에 불을 지르고 돌아보니, 경제적인 불안정은 뼈에 사무치고 피부에 사포를 가는 수준으로 아주 제대로 실감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방향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나의 선택지의 장점들을 열심히 찾고, 기록하고, 가꾸며 정을 붙여야 한다. 매일 빠짐없이 8시간씩 자고, 내가 내킬 때 동네 산책을 나가거나 노트북을 들고 한강 공원으로 향하는 여유를 부린다. 출근을 하기 싫은 날에는 거실에서 일을 하면서 고양이를 껴안고 뒹굴다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한다. 아쉬운 부분은 완전히 없앨 수 없으니 그나마 더 아쉬울 수 있도록 가계부를 꼬박꼬박 쓰고, 불필요한 지출을 아낄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한다. (이런 고민은 자연스럽게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소비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서 여러모로 선순환인 것 같다.)

    살면서 만나는 선택지는 대부분 49와 51 중 무엇을 택하고 버릴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한다. 49와 51 사이의 작은 간극때문에 선택이 어려워지기도 하지만, 막상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걷지 않은 나머지 길이 갑자기 몇 배는 더 아쉽고 좋아보여서 선택 직후에는 만족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근데 49와 51의 차이라면, 사실 당시에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되는 행동도 돌아보면 더 나았던 선택과 얼마 다르지 않으니까 별 상관 없지 않을까? 당시에는 내 인생을 진흙탕에 갖다 처박는 것 같았던 무시무시한 결정들도 돌이켜보면 49 또는 51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적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오늘 기존에 쓰던 사무실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짐을 챙기러 방문했었다. 그래서 오늘 유달리 날카롭고 예민했던 건 글을 쓰면서 진이 빠진 이유 뿐만 아니라, 고작 월 27만원을 아끼기 위해 업무 공간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나의 현 주소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다버린 49를 쿨하게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내가 당장 이렇게 속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이 길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늘 여기에 시원하게 털어버리고 내일은 홈오피스를 구상하면 된다. 그러고 또 아쉬운 일이 생기면 아쉬워하면 그만이다. 프리랜서의 덕목을 이렇게 하나씩 느릿하게 체득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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