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드문 행복의 기록
    gita 2021. 5. 9. 00:31

    오늘의 깜찍한 순간, 듬미의 신나는 뒷다리


    오늘 하루는 단 한 번도 힘들다, 싫다,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아침 열 시에,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일어났지만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니까. 그리고 개운했으니까. 일어나 습관처럼 핸드폰을 보니, 전날 새벽에 의뢰를 고민했던 고객이 마음을 정했는지 입금을 해두었다. 11만원. 주말에 일하기 너무 싫어서 평소보다 꽤 높은 견적을 불렀는데 의외로 응해주었다. 아.. 이래서 우리집 앞 케이크집 사장님이 주7일 일을 하는 건가. 아무튼 일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약속한 피드백을 보내주었다.

    일어나 화장실을 갔을 때는 '요리해야 하는데, 하기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R이 왠일로 파스타를 밖에서 먹자고 한다. 왠만해 먼저 외식을 제안하지도 않고, 그것도 집에서 쉽게 해먹는 요리인 파스타를 먹자고 하지도 않는데 이게 왠 떡인가! 덥석 물어 11시 30분에 오픈하는 식당으로 부랴부랴 향했다. 도착하니 11시 36분이었는데. 대체 왜. 망원동에서 약속을 잡는 사람들은 이토록 부지런한가. 이미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식당은 분주하다. 그들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평소엔 입지 않는 셔츠 깃도 세우고 딱 붙는 청바지도 꺼내입었는데 괜히 시시해졌다.

    다른 곳에도 몇 번 기웃거리다가 포기하고 서브웨이행. 듣지도 않고 양상추는 무조건 올려버리는 알바가 아니라 R이 행복해했다. 둘이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벌써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오늘 코엑스에 가면 사람에 치어 죽겠지, 바람이 많이 부는데 저 입간판 자꾸 쓰러지네, 쿠키가 너무 달아. 밖에선 나뭇잎이 부산하게 흔들렸다. 다 먹고 그릭요거트를 사서 집으로. 사장님이 포장용 컵 리드를 찾지 못해, 요거트와 과일로 이루어진 탑을 위태롭게 들고 집으로 향했다. R은 쓰레기 하나 줄었다며 좋아했다. 터벅터벅.

    집에 와서는 뜨개질을 좀 하다가, 문득 아빠에게 만들어 둔 카네이션 꽃바구니 사진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생신을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굳이 찾아오지 말라는 새엄마가 고마웠다. 드릴 용돈이 없으니까.. 하지만 돈이 없으면 시간과 노동을 들여 대충 정성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나름 지금까지 선물하기 위해 만든 작품 중에선 가장 정성을 많이 들이긴 했다. 꽃을 열두개 만들고, 꽃받침도 열두개 만들어서 꽃에 꿰어 붙이고, 난생 처음으로 꽃철사와 니퍼라는 것도 사보고. 바구니는 살 뻔했는데 다이소에서 안 팔길래 그냥 만들어버렸다. 수북히 꽂힌 꽃을 보니 괜히 내 마음도 뿌듯하다. 사진 세 장을 찍어 아빠한테 보냈다. 아빠, 당분간은 이걸로 연명해요. 아빠 생신이랑 승진 챙긴다고 50만원짜리 몽블랑 펜을 질렀더니 통장 상태가 말이 아냐.

    저녁이 다가왔을 땐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일 자정까지 완성해도 괜찮다는 고객이 갑자기 더 일찍 달라고 해서 부랴부랴 작업하고, 오늘 제출 마감인데 분량 줄여달라는 고객이 있어 그것도 작업하고, 꼼꼼하게 질문을 하는 고객을 만나 역시 꼼꼼히 답변을 해드렸다. 도중 R에게 과외를 넘겨줄 분으로부터 연락도 받았다.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의외로 순항하게 되어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러고 오늘 생일인 친구, 그리고 다음주에 만날 예정인 친구와 카톡을 했다. 여기에 자세히 쓰긴 어렵지만, 장원급제 급의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부러움보다 너무 장하고, 대견하다는 마음이 앞섰다. 느끼는 그대로 적어 전한 뒤 "너를 이렇게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나의 삶에 만족해서, 그리고 너가 이만큼 좋은 친구라서 참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이후에는 그 친구가 그 성과보다 더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게 있었는데 놓쳐버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있었다는 것도 얘기하고, 프리랜서의 비정기적 무급 휴가에 대해서도 소상히 얘기를 나눴다. 사회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난 그 친구의 발치에도 미치지 않지만, 우린 우리 주변을 둘러싼 비슷한 사람들과는 나눌 수 없는 대화를 서슴없이 해낸다. 제대로 된 이야기는 거의 몇 년 만인데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사이. 참으로 감사한 친구다.

    그렇게 대화, 그리고 오늘까지 마감이었던 작업건을 마무리하고 거실에 앉아 이 일기를 쓴다. 마음 같아서는 뜨개질을 더 하고 싶었는데, 실은 언제든 잡을 수 있지만 오늘의 생생한 경험은 오늘만 남길 수 있으니까. 적어둔다. 처음부터 끝까지 딱히 마음에 걸리는 일 없었던 드문 하루.

    'gita' 카테고리의 다른 글

    P.R.R.W.  (0) 2021.11.23
    211106  (2) 2021.11.06
    단상  (0) 2021.05.07
    2021년 2월 초의 일상  (0) 2021.02.10
    나를 찾지 않는 신에게, 기도합니다  (0) 2021.01.19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