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나의 일을 만든다는 건
    2021. 11. 13. 00:20

    매주 금요일을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내가 쓴 글이 전시됐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안 됐으면 좋겠는지 모르겠다'고 적었는데, 오늘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일주일이 지나 나를 비롯해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쓴 글을 모은 책자를 수령하러 갈 겸, 수령 장소인 책방에서 진행되는 전시를 내심 기대하며 달려갔는데 왠걸 벽이 휑했다. 우물쭈물하는 책방 주인에게 물어보니 신청을 도와줘야 하는 친구가 아직 오지 않아 설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아... 난 책방에서 편도 한 시간 거리에 산다. 이걸 다시 보겠다고 주말 중에 올 것 같진 않으니, 내 글이 전시되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주인이 입구까지 쫓아나와 연신 미안해해서 주말 중에 다시 오겠다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해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소원은 너무 열심히 빌다가는 진짜 이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루어진 소원이 하나 더 있다. 지난 주에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었어서 조금 조바심이 났었다. 거기에 임대료 문제로 사무실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시기와 겹쳐서 두 배로 더 의기소침했는데,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일이 제발 생겼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것 같다. 하늘에 내 뜻이 닿았는지 주말부터 갑자기 연락이 밀려들어오고 급기야 월요일부터는 매일 아홉 시간을 내리 일해야 할 정도로 일 폭탄이 터졌다. 새로 마련한 홈오피스 신고식을 아주 시원하게 치뤘네. 왜 다들 이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찾아오는지 모르겠다며 '다음주엔 좀 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일이 뚝 떨어진 걸 보니 그 소원도 이뤄진 것 같다. 아, 로또 당첨을 빌었어야 하나.

     

    이렇게 한 달은 커녕, 한 주의 수입 조차 가늠할 수 없는 프리랜서로 산지 벌써 일 년이 넘어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최선만 다하라는 격언은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겠지만, 프리랜서에게는 특히 가슴에 새기고 매일 다섯번씩 복창하는 말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매월 25일이 되면 은행 앱 푸시 알림이 오면서 일곱자리 숫자가 띡 찍히는 일 따위 없다. 그 불안감 때문에 일을 시작한 첫 두 달은 일주일에 하루도 통째로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다. 난 큼직큼직한 결정은 칼을 휘두르듯 시원하게 지르지만, 매일 반복되는 작은 선택들에 있어서는 쓸데없이 보수적이고 걱정이 많은 편이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내일, 다음주 혹은 다음 달에도 이 정도 일이 들어올 거라고 누구도 약속할 수 없다면, 현 시점에서 최대한 많이 벌어두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으니까. 하지만 세 달 즈음 되면서 직장을 다닐 때보다 더 심한 번아웃이 오면서 거의 2주를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문득 이 정도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돈까지 많이 벌지도 못하면 회사를 왜 때려쳤나 싶었다. 적게 버는 대신 건강하게 살기 위해 퇴사했는데 이렇게 사는 건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먹었다고 하루 아침만에 느긋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5점짜리 리뷰에 '언제 연락해도 빠르게 답변해주셔서 좋았습니다' '궁금한 게 생기면 칼같이 답장해주세요'와 같은 말이 달리는 걸 볼 때마다 밤 열두시에도 답장하길 잘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회사 다닐 때 인도놈들한테 새벽까지 시달리던 것과 차이가 없다는(근데 돈은 덜 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24시간 열어두었던 카카오톡을 근무 요일 동안만 24시간으로 바꾸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해도 마치 회사 다닐 때 주말에도 습관적으로 사고를 예감하며 메일함을 확인하듯이 자꾸 채팅창을 들락거리게 되어서, 휴일에 생기는 긴급한 일은 이메일로 연락을 받는 방식을 써봤다. 메일도 푸시 알림이 오긴 하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채팅처럼 실시간으로 답장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고객 입장에서도 휴일에 부득이 연락을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는지 연락 빈도가 확 줄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준 변화가 바로 근무 요일 중 근무 시간에만 채팅이 가능하도록 설정을 바꾼 것이다.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 후에 연락을 줘도 이메일로 연락하라는 알림 메세지가 가고, 내게는 알림이 오지 않는다. 한 줄로 요약하면 '근무 시간에만 연락을 받기로 했다'는, 어떻게 보면 되게 상식적이고 별 거 아닌 조치인데 이렇게 바꾸기까지 거의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면 믿겨질지 모르겠다. 내가 뭔가 했을 때(혹은 하지 않을 때) 다음달 수입이 0원이 될 수도 있다는 그 불안감이 상식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문득 사장의 운영 철학이 유독 도드라지던 몇 가게들이 생각난다. 일주일에 이틀만 매장을 운영하는 곳, 재활용 용기를 지참하지 않으면 테이크아웃이 불가능한 곳, 특정한 목적 이외에는 대관을 하지 않는 곳. 누군가는 '예비 진상 취급을 받는 것 같다'며 불만 가득한 리뷰를 쓰게 만드는 이유겠지만, 그런 조치의 본질은 결코 누군가를 진상으로 몰아가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분명 고객의 입맛에만 맞춘다면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고, 더 많이 벌고, 비용을 더 절감할 수도 있겠지만, 사장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내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결정이라는 것이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 공지를 적어 올린 날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나와 같은 시행착오와 내적 갈등과 저울질을 거치며 다듬어진 결과일 것이다.

     

    나의 일을 한다는 건 그냥 '일'이 아니다. 일 자체가 내게 가져다주는 금전적이거나 정신적인 보상, 혹은 내가 투입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비용에 대한 계산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슨 일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할 지 결정하다보면, 나의 인생에 있어 일이 가지는 의미와 비중과 때로는 일과 전혀 무관해보이는 나의 철학과 가치까지 고찰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누군가의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일, 그래서 그 자체로서 보람도 크고 또 희소성이 있어 금전적인 보상도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에게 있어 아무리 보람찬 일도 일주일에 4일 이상 투입할 가치까지는 없는 존재다. 난 일주일의 과반은 푹 쉬면서 몸을 쉬고 예민해진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4일 일하고 3일 쉬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3일만 일하고 4일 쉬는 것!)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도 금요일과 주말에는 쉬고, 그 때 잡을 수 있는 기회와 보상을 시원하게 포기하기를 택한다. 그렇다고 내가 근무일을 줄이면서 소득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불로소득을 쌓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럴 거면 회사에 남아서 목돈 만들겠다고 존버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내용과 방식은 내가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쓰려는 사람이고, 내가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성장에 관심이 있다는 철학까지 반영된 결과다.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바뀌면 또 거기에 맞춰 일의 모습을 바꿀 수 있을 것이고,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또 다른 진부한 교훈이 이렇게 심금을 울린다. 홀로서기란 이렇게 당연한 말의 의미를 진득하게 곱씹으며 천천히 내 것으로 만드는 길인가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도기행  (0) 2021.12.12
    어떤 선량한 오해  (2) 2021.11.07
    ‘꺼져’라는 카드에 대해  (0) 2021.05.07
    '언제' 말고 '왜' 하는가  (0) 2021.02.21
    그때의 야근, 지금의 야근  (0) 2021.02.2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