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꺼져’라는 카드에 대해
    2021. 5. 7. 16:53

    어떤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고양이들이 드나드는 화장실 문이 그렇다. 하지만 좀 애매한 방식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문도 있다. 예를 들어 비상문은 평시에는 꼭 닫혀있어야 하지만,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꼭 열려야 할 것이다. 그 문은 그렇게 언제든 내가 원하면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가능성의 존재는, 평소에는 그 가능성을 시험하는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소중하다.

    프리랜서로서 진상 고객을 대하는 일도 그러하다. 왠만하면 꺼내지 않는 카드지만, 상대방이 정말이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인간일 때에는 끊어낼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 물론 비상문처럼 이를 실제로 활용해야 하는 상황은 드물다. 일단 돈을 받고 작업을 하던 도중 상대방이 말썽을 피우면 빠져나갈 구멍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수업 일정을 잡기 위해 남긴 카톡에는 절대 답장을 하지 않으면서, 지가 필요할 때에만 쏙쏙 질문하고 자료를 받자마자 날 차단해 버린 고객이 있었다. 나를 챗봇 취급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지만 작업 자체를 무를 정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아 그냥 뒀다. (화가 날 때는 내가 받은 돈과, 내가 해소하고 싶은 감정의 경중을 비교해보자.)

    반면 돈이 오고 가기 전에, 문의하는 과정부터 무례한 사람은 다른 이유를 대면서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쉽다. 그런 부류는 중고거래 진상 유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빈정대며 말도 안 되는 견적으로 후려치려고 하는 사람, 거래 약속을 다 해두고 돈을 보내주기 직전에 갑자기 말을 바꾸는 사람, 계속 찔러보기만 하면서 유료로 제공되는 서비스까지 어떻게든 공짜로 받아보려는 사람. 상대방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탓하고 싶진 않다. 그걸 내게 어필하며 협상하는 과정에서 나를 폄하하는 태도가 기분이 나쁠 뿐이다. 그럴 땐 그냥 일정이 꽉 차서 진행이 어렵다고 하면 대부분 깨끗하게 떨어져나간다.

    비상문을 열어제낄 수 밖에 없던 천재지변은 딱 한 번 일어났다. 첨삭에 필요한 정보를 받다가 대뜸 내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길래 거절했더니 지랄을 했던 사람이었다. 난 고객 그 누구에게도 개인 번호를 알려주지 않고, 모든 연락은 카카오톡 채널과 이메일을 통해 한다는 원칙이 있다. 전 남자친구에게 반 년 동안 스토킹을 당하다 번호를 바꾼 후엔 그냥 찝찝해져서 다시 보지 않을 사람에겐 번호를 주지 않는다. 전화번호 없이도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고 와이파이를 쓰면 심지어 무료인데, 무슨 대단한 연예인 마냥 비싸게 구는게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나는 내 개인정보 다 주는데 넌 왜 못 주냐, 이건 상호간의 신뢰 문제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 많은 아저씨였는데, 어린 강사가 만만한지 반말도 툭툭 섞어 가면서 훈계질 파티가 열렸다. 그 사람이 날 스토킹 할 것도 아니고, 그깟 번호 그냥 주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만의 이유로 민감한 문제인데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이스톡이라는 훌륭한 대안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사고방식까지 지적질을 해대길래 그냥 다른 분 찾아보라고 하고 차단해버렸다. ‘보기 싫은 고객한테 꺼지라고 말하기’ 카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탈출 성공!

    이렇게 적긴 했지만 그러고 마음이 마냥 편했던 건 아니다. 고객이 내게 연락을 했던 앱 상에서는 나를 여전히 고용한 것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별점테러를 당할 수 있었다. (고용 관계가 중단되더라도 강사 측에서 고용 여부를 취소할 권한이 없다! 대체 왜..?) 그걸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대화내용을 첨부해 앱에 고용이 중단된 상황을 알리고, 며칠 간은 삼 초에 한 번씩 리뷰창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기다리는 영겁의 시간을 보내며, 또 다른 이유로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그냥 번호를 줬어야 하나? 그게 뭐 어렵다고... 그 작업을 맡았다면 난 20만원이 넘는 돈을 쥘 수 있었다. 돈을 포기한 것도 그렇고, 그냥 내가 고객한테 쓸데없이 민감하게 군 것인지 스스로 여러번 물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예민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한 일주일이 지났다. 천만다행으로 그 사람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주었다. 걱정이 사라지고 나니 잠깐 흔들렸던 마음도 돌아왔다. 내게 말이 되는 원칙이라면 몇 만원을 위해 타협하지 말자. 그 뒤로 백 건이 넘는 작업을 받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번호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비슷한 어떤 문제도 없었다. 이 정도면 나의 영업활동에 영향을 주는 원칙도 아닌데, 앞으로는 또라이 한 번 만났다고 내가 세운 타협의 척도를 쓸데없이 의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내가 거래 관계에 있어 마냥 ‘을’은 아니라서. 싫을 땐 싫다고 말하고 얼마 정도의 수입을 포기할 선택지가 있어서. 물론 이번처럼 과격한 에피소드는 무척 드물다. 또는 내가 돈이 정말 궁한 시점이었다면 눈물을 삼키고 굽신대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드문 순간에 꺼내들 수 있는 ‘꺼져’라는 카드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얼마나 안도가 되는지! 그 카드는 마치 부적과도 같아서 주머니에 찔러넣고만 다녀도 저절로 어깨가 펴진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일을 만든다는 건  (0) 2021.11.13
    어떤 선량한 오해  (2) 2021.11.07
    '언제' 말고 '왜' 하는가  (0) 2021.02.21
    그때의 야근, 지금의 야근  (0) 2021.02.20
    우울한 가운데 응원을 받았다  (1) 2021.02.19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