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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연옥이 아닌 인간 박 모씨로서의 사적인 기록을 남기고 싶은데, 혼자 쓰면 외로우니 남이 좀 봐줬으면 좋겠고, 네이버 블로그는 애탄 홍보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거기에 이 정도로 자잘한 이야기를 적기는 싫고, 그래서 오랜만에 티스토리로 돌아왔다.
이 블로그가 남아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한동안 꽤 오래 써왔다는 사실도. 내가 잊고 있던 2020년, 2021년의 기록이 남아있어 몇 개 읽어보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줄 모르고 허공에 주먹을 날리며 고군분투하고 있었구나. 경제적으로는, 막 퇴사를 하고 다시는 조직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칼을 갈고 프리랜서로 주7일 불태울 때였고. 관계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혼인신고만 한 채 사랑하는 사람과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서 모든 걸 공유하며 사는 삶의 비극과 그 와중의 소소한 즐거움을 교차해 누리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혼한지 1년 8개월이 되었다. 두 달 전에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이럴 줄은 몰랐지. 지금의 내가 실망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말 현상 자체만 두고 봤을 때,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겸손해졌다, 이 정도다.
이혼 직후, 반평생을 함께 하려던 사람과 미래 계획이 한 순간에 날아가고 남은 폐허 속에서 혼자 살았다. 거대한 구멍을 채우려 미친듯이 나돌며 친구들을 사귀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던 내가 클럽이라는 곳도 가보고, 소개팅 앱도 지겹도록 돌리며 열심히 몸을 굴리고 마음도 너덜해질 때까지 떼어다가 바쳤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애타게 바랐던, 동반자라는 자리에 준할 정도로 훌륭하고 안정적인 관계는 만나지 못했지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넓으면서도 깊은 안전망과 같은 친구들을 여럿 사귀었다. 늘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었던, 일대일 독점 유성애 관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뾰족하게 주고 싶던 사랑을 넓게 펴바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올해에 예기치 못하게 진한 연애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겸허해졌다. 인간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다양한 관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포용력과 지식은 늘었음에도, 결국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고 가슴 깊숙한 곳부터 솔직하게 갈망하는 건 단 하나의 짝꿍이었다. 거기에서‘만’ 관계와 관련된 모든 갈증을 풀고 싶어하고 지나치게 의존하던 극단성은 줄었지만, 아무리 넓고 깊게 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도 애인은 달랐다. 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돌보고, 사랑해야만 행복한 사람이구나. 마음을 의탁하고 의탁받는 수준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지, 그것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고 전혀 다른 대안을 찾는 건 내게 맞지 않구나. 바꿀 수 없는 건 아무리 부끄럽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그럼 망가져있더라도 최소한 투명하게 망가지고, 나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며 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 자꾸만 이상한 곳으로 도망가고 회피하는 어리석음을 줄일 수 있다.
동시에 아무리 사랑해도 나를 버리고 해치면서까지 지켜야하는 존재는 없다는 걸 여러 차례에 걸쳐 깨닫고, 과연 내가 전처럼 다 내어주고 다 받아주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사랑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나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방패처럼 두르고 있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전남편 같은 거대한 배신이 날아와 내 삶을 다시 한 번 산산조각 낼 것 같아 두렵다. 안그래도 어깨에 바짝 긴장을 넣고 늘 경계 태세로 살았는데 배우자의 외도라는 대재앙급 사건을 겪고 방어력이 한참 올라갔다. 이런 상태로 조마조마하며 사는 건 참 피곤하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혼자 사는 게 벅찬데... 그리고 그런 천재지변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긴 하다.
그럼 어쩌지?
언제나 그렇듯 답은 없고, 이 시간도 나중에 돌아보면 헛발질로 기억될지도.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최고의 판단력을 발휘해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첫 회사를 퇴사한지 6년 2개월만에 직장인이 된 게 믿기지 않는다. 걸어서 조직 밖으로 뛰쳐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란 의지를 담은 제목으로 팟캐스트도 운영했었는데, 돌고 돌아 달콤한 월급의 품으로 돌아왔다. 조직 밖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불안정한 수입과 커리어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체감했고, 그 대가를 치른 덕분에 얻은 자유와 유연성이 또 얼마나 좋은지도 배웠다. 하지만 (이전 글에도 썼듯이) 삶이 49와 51 중 무얼 택하고 무얼 버릴지 고민하는 괴정이라면, 이번레도 난 아슬하게 우위에 있는 51을 선택했다. 자유를 좀 포기하고 매달 들어오는 돈과, 그걸로 안정적으로 계획하고 예상할 수 있는 미래와, 소속감과, 자기효능감을 얻기로 했다.
그래도 풀재택에 프리랜서에 준하는 수준의 독립성과 개인 능력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직무라, 어떻게 보면 프리였을 때 누리던 장점도 일부 가져오면서도 안정성까지 더한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두 달차지만 만족한다. 언젠가 여기를 떠나더라도 이직을 하면 했지, 다시 완전히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나 알바생(혹은 그 모든 걸 병행하는 쓰리잡) 시절로 돌아가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집을 사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남의 집 전세 계약 만기가 돌아오는 3년 뒤까지. 이 역시 상술한 직업과 관계 문제와 다를 바 없이 울타리와 안정성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목표다. 확실한 수입이 생겼으니 최소한 계산기는 두드려볼 수 있게 되기도 했고. 평생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던, 늘 무언가 은폐하고 맞고 불안에 떨어야만 했던 집이라는 공간을 이제는 내 손으로, 내가 가장 안전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사를 그만 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지금까지 엄청난 유목민으로 산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에는 아빠 직장 때문에 전학을 대여섯 번 다녔고, 그 뒤에는 집을 피해 고등학교와 대학교 기숙사를 전전하면서 ‘본가에 남아있는 내 방’ 같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학을 졸업하며 자취를 시작했고, 대부분 본가에 뒀을 졸업앨범이나 사진들을 그때 넘겨 받았다. 그럼에도 엄마와 아빠 사이에 찢어져 유실된 자료가 많아 안타깝지만. 아무튼...
대학교 기숙사를 나와 쌍문, 봉천을 거쳐 지금의 망원동 집까지 와서 7년 째 살고 있다. 전세 보증금 대출 만기까지 3년 남았다.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꽉 채워서 살았고 살 예정인데도 여전히 여기가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대충 만든 간판을 달아둔 임시 정류장, 간이역 같은 느낌이다. 기적적으로 정부 임대 주택에 당첨되어, 또 10년을 연장해서 어디 다른 곳에서 살 수 있게 되더라도 그 10년 뒤에 또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싫다. 지금 이 집처럼, 사는 동안 내내 임시 거처라는 느낌도 벗어던지기 힘들 것 같고. 모르겠다. 현실을 모르는 멍청한 소리인가. 마흔도 채 되지 않았고, 사회 생활 경력만 다 합치면 2년도 되지 않는 애송이가 세상 물정 모르고 빽빽거리는 거일 수도. 하지만... 타협 좀 그만 하고 싶고... 내가 가장 편안히 느끼는 공간에서 오래오래 쉬고 싶다. 다른 걸 떠나서 인간이면 주거 안정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지, 그 당연한 필요를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게 만든 이 세상이 이상한 거 아니냐!
어쩌다보니 한없이 길어지는 글. 오랜만에 토해내는 일기가 다 그렇지 뭐...
아무튼 요즘은 한의원에서 무릎과 손목에 봉침을 맞으며 손바닥만한 피멍을 모으고 있다. 멍이 잘 드는 피부라서 어쩔 수 없댄다. 절뚝거리며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을 오르내리고, 책상 앞에 틀어박혀 일을 한다. 고맙게도 애인이 자주 면회를 온다. 그리고 다행히 차를 운전하는 데에 무릎이나 손목이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아서, 일단 계단 아래까지만 내려오면 어딘가 이동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연애 초반처럼 요즘도 종종 애인을 보러 차로 달려가 명예 경기도민 행세를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진짜 치료 받고 일만 하는 것 같기도. 손목 때문에 애정하는 취미인 뜨개질도 쉰지 1년이 넘어가고, 자전거도 못 타는지라. 그와중에 또다시 쓰레기방이 되어가던 작은방을 다시 한 번 뒤집어 엎었고, 털어도 털어도 계속 나오는 전남편의 짐에 기함하고, 예물로 맞췄던 금반지를 어디에 팔아야 돈을 제일 잘 쳐줄지 알아보느라 바쁘다. 청소 중 발굴한 잡동사니 중 쓸만한 건 대부분 기부하거나 헌옷수거함으로 보내고, 간간히 몇 개는 당근에 올려 용돈벌이도 한다.
요리도 열심히 한다. 하루종일 집에서 일을 하니 삼시세끼도 다 차려먹는다. 호화롭게 7첩 반상을 준비하는 일은 드물고, 미니 오븐에 호밀빵 데워서 직접 만든 후무스 발라 먹거나 냉동 만두 쪄서 먹고, 좀 여유가 있으면 국이나 반찬을 하고, 그 정도. 그럼에도 식비가 (식재료 구입비에 한해) 월 30만 원 정도로 내려와서 놀랍다. 사실상 배달음식을 끊었는데, 그 기점으로 살도 5키로 정도 빠졌다. (야르 ㅋ)
요리는 나 자신도 돌보고, 주변 사람들도 돌보는 나만의 방법이다. 원인 불명의 잇몸 통증에 시달리던 애인을 위해 온갖 죽을 쑤고 처박아둔 슬로우쿠커를 꺼내서 그 어떤 식재료도 부드럽게 녹인 일종의 유동식을 여럿 만들었다. 계란죽, 소고기야채죽, 새우죽으로 만들려다가 새우가 빠진 그냥 야채죽, LA갈비찜, 와인과 온갖 향신료를 다 때려박은 의문의 닭 요리, 삼계탕 재료 넣고 끓인 닭곰탕, 순살 감자탕, 돼지 앞다리살 조림. 애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반 년 전에 나를 꼬실 때부터 예고편을 던졌던 달걀 장아찌를 담가주었다. 끝내주게 맛있고 감동이다. 음식, 요리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이 있는 것 같다. 오늘도 몰아치는 업무와 맹독 봉침의 콜라보로 너무 지쳐서, 아플 때 꼭 먹는 배추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불고기도 볶아 먹고. 병아리콩도 하루 꼬박 불려서 후무스 만들고, 나머지는 밥 지을 때 넣고. 건강 이슈와 재택근무 조건이 겹쳐 사실상 가택연금을 경험 중인데, 요리가 재밌어서 할만하다. 살만하고.
그래, 요즘도 드물게 위태로울 때가 있지만, 오늘 고마운 친구가 말했듯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살아서 행복하게 만나고 싶다. 애인이 우리집에 올 때마다 냉장고 옆면에 붙어둔 화이트보드에 작은 메모를 남기는데, ‘또 보자’ ‘또 하자’는 말이 유독 오래 기억이 남는다. 그 제안에 응하고 약속을 지키려면 살아야한다. 아주 행복할 수 없다면 최소한 끔찍한 불행 없이, 차라리 지루할지언정 너무 무너지지 않도록 마음을 착실히 지키면서.
아무튼 여기에 간간히 근황을 적을 예정이니 많이 놀러와줬으면 좋겠다. 끝.'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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