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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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설을 보내며마음 2021. 2. 14. 23:11
오늘은 R과 아빠네 집에 다녀왔다. 아빠와 새엄마가 R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인상이 선해보이고, 젓가락질 잘하고, 한식을 주는대로 잘 먹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 이상으로 우리는 깊게 대화하지 않는다. 아니, 그 무엇에 대해서도 우린 깊게 대화하지 않는다. 난 아빠에게 왜 이전에 살던 신축 아파트에서 더 살지 못하고 십년은 더 낡은 것 같은 곳으로 이사했는지 묻지 않는다. 아빠는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 회사 다닐때에 비해 수입이 얼마나 줄었는지, 전세자금대출은 얼마나 갚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런 궁금증은 묻어두고 게장을 언제 담갔는지, R이 생선전을 먹을 줄 아는지 대화만 해도 시간은 금방 간다. 나의 신경은 온통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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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딩, 현재를 단단히 붙드는 방법마음 2021. 2. 11. 22:27
새벽 몇 시였는지도 모르겠다. 꺽꺽대며 울다가 번쩍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 축축한 얼굴과 베개만 느껴지는데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처럼 엄마에 대한 악몽에 흠뻑 젖었다가 깨면, 온 감각이 무뎌지며 몸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그럴 땐 웅크린 자세로 울음을 다 토해낼 때까지 견디고 또 견뎌내야만 했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 겨우 숨이 잦아들어야만 저지레는 끝이 났다. 하지만 최근에는 작지만 중요한 행동을 하나 더하기 시작했다. 모든 의지를 짜내서 어떻게든 침대 끝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불을 켜는거다. 주변이 환해지면 익숙한 침실 벽지도, 벽에 걸어둔 고양이 가랜드도, 이불 아래로 삐져나온 발끝도 보인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색깔들을 속으로 되뇌기 시작한다. 벽지의 네모 무늬는 회색, 고양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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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자, 그게 더 건강하니까마음 2021. 2. 3. 22:32
퇴근하는 나를 데리러 오던 R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눈이 엄청 와!’ 과연, 건물을 나와보니 굵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필 후드가 달리지 않은 옷을 입은 날이라 R을 방패삼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골목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갓 하늘에서 내려온, 뽀얗고 깨끗한 눈이 내 발 밑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눈을 감고 천천히 걸어보았다. 뽀득, 뽀드득, 이럴 때만 들을 수 있는 귀한 소리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생각해보니 밖에서 이렇게 느린 속도로 걸어본 건, 그것도 눈을 감고 해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지켜야 할 시간 약속이 없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여유니까 그럴 법 하다. 오늘 한껏 낭만을 만끽했던 길은 회사를 다니던 시절, 새벽 6시 40분에 떠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