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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아하는 걸 마냥 좋아할 수는 없어
    사람 2021. 12. 19. 01:10

    나는 뜨개질을 사랑하지만 힘들 때도 많다. 새로운 기법을 처음 배울 때 느려 터지는 속도 때문에 답답하고, 연달아 실수가 나면 고쳐야 할 생각에 한숨이 나오고, 기껏 다 완성했는데 밑단을 자르고 전부 푸르기도 한다. 좋아하는 걸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함께 딸려오는 고통을 인내할 줄 알아야 계속 좋아할 수 있다.

    대학교 때 풍물도 그랬다. 무거운 악기를 메고 오금을 넣고 뜀박질을 하다 보면 무릎 관절이 삼십 년은 일찍 늙을 것 같았다. 한겨울에 손이 터질 것 같은데 같은 가락을 체감상 삼십 분씩 두드리고 있으면 그냥 집에 가고 싶어진다. 아무리 해도 손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자꾸만 박자를 놓치고 욕을 먹는다. 그래도 했다. 좋아하니까. 선배들은 우리가 판을 뛰고 있는 걸 보면 ‘농악은 관객이 되어서 보면 같이 뛰고 싶어서 근질근질한데, 막상 악기를 잡으면 바로 그만두고 싶어진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악기 치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 공감하는 말이다. 아니, 이건 지긋지긋할 정도로 좋아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오죽할까. 연애에 막 눈을 떴을 때에는 상대방의 모든 걸 좋아하려 애썼고 나 역시 모든 걸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쳤다. ‘쿨한’ 연애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나 가능하지. 작은 균열이 생기면 나의 완전무결한 사랑이 망해버린 것 같아 어떻게든 고치려 애를 썼다. 그렇게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서로의 모든 걸 좋아할 수도 없고, 심지어 좋던 게 싫어지기도 하고, 좋아지는 것도 싫어지는 것도 사실 별 이유가 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으며 좀 허무해졌다.

    그러던 와중 R을 만났는데, 지금까지의 연애는 모두 무료 체험판에 불과한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좋은 의미로, 혹은 나쁜 의미로.

    R을 만나며 내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스펙타클한 일들이 많았다. 여기에 다 적을 수도 없고 또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적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확실한 건 액운은 국적 불문 외국인에게도 충분히 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불운만 계속되던 날들, 전과 같았다면 나는 도망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 안전하게 확보한 뒤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R과는 정말이지 그럴 수 없었다. 당시에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 뭐 내가 워낙 애정결핍이 심해서 누군가와 잘 헤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라던가, R과 내가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동정심에 헤어질 수 없었다던가 - 돌이켜보면 그 무엇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함께 겪고도 누군가와 같이 살려면 아마도 신이 개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은 R과 나를 아주 질긴 붉은 끈으로 단단히 묶어놓은 게 분명하다. 솔직히 그냥 나라도 살자고 R을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도 많았고 수없이 결심도 하고 통보도 해봤었는데 모두 실패했다. ‘실패’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에 가까웠다.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다 이해할 수 있었고, 받아들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내 마음 한 켠을 도려내는 한이 있더라도 피를 뚝뚝 흘리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날 직감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을 R도 알 수 있도록 약속했다. 나는 너랑 지옥불이라도 걸어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너랑 같이 있으면 우리 둘에게만 궃은 비가 쉴 새 없이 내리고, 그 비를 맨 몸으로 맞으며 진흙으로 뒤덮힌 비탈길을 한없이 굴러가는 느낌인데, 그래도 너를 놓을 수가 없다고. R은 엉엉 울면서 그냥 놓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이런 관계에서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나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를 미쳐 돌아버리게 만들 것 같은 그의 모습도 난 받아들여야 한다.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사랑은 그렇게까지 관용적이지 않다.) 왜냐? 그걸 받아들이지 않아도 못 헤어지는데 어차피 계속 같이 살아야 한다면 받아들이는(혹은 무시하는) 편이 나으니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는 사랑 앞에서는 좋아하는 것만 마냥 좋아하지 않기로 한다. 억지로 긍정하지도 않기로 한다. 뜨개질이나 농악 따위에서도 실천해야 했던, 사랑과 함께 당연히 따라오는 그 고통을 그냥 끌어안는다.

    추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게 내가 아는 사랑의 모습이다. 사랑은 그저 조건 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만 고르지 않고, 엉망진창인 모습까지 다 본 사람들이 그걸 다 봤는데도 여전히 같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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