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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을 벨 거면 칼을 왜 뽑겠어
    사람 2021. 5. 9. 23:09

    배민오더로 주문한 찜닭을 기다리며. 대화를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서로 폰을 보는게 이상하지 않아졌다.

     

    앞으로, 아마도 아주 긴 시간 동안 같이 살 사람과는 싸우는 게 그다지 영양가가 없다. 각자 집이 있는 상태에서 연애할 때와는 다르게, 생활반경이 겹치기 때문이다. 밖에서 연애할 때에는 있는 힘껏 싸우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 화를 삭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유독 마음에 안 드는 그 습관만 고치면 참 완벽할 거란 생각도 하고, 이럴 바에는 그냥 확 끝내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같이 살기로 결심을 한 사이는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 여유조차 없다. 고개만 돌려도 그 사람이 거기에 있어서 가라앉을 뻔한 감정이 다시 치고 올라온다. 그렇다고 집 밖으로 내쫓으면, 그건 밖에서 싸우다 혼자 집에 가 버릴 때보다 몇 배는 무서운 결과로 돌아온다. (실제로 그래본 적은 없어 그냥 상상을 해봤다.)

     

    그래서, 어쩌면 지극히 효율적이고 편리한 이유 때문에 싸움이 줄어들게 된다. 동거 초반에는 R이 설거지하는 방법부터(널어둔 행주로 그릇을 이쁘게 닦고 있길래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국에는 dishtowel에 대응하는 존재가 없다는 걸 R은 몰랐다) 내가 라면을 후루룩 먹는 소리까지 계속 부딪혀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분들은 여러번 부딪혀야만 무뎌지고 둥글어져서 비로소 같이 살 수 있게 된다. (난 내가 할 게 아니라면 터치하지 말자는 마인드를 갖추게 되었고, R은 나의 후루룩 소리가 '비록 무척 거슬리지만' 그래도 존중한다고 해줬다. 그런 말을 들으니 지적질을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미안해져서 나도 모르게 조용히 먹게 되었다.) 하지만 그냥 기분을 잡치고 감정이 날카로워서 싸우는 건 그만큼 생산적이지 못하다. 칼로 물을 벤다고는 하지만 물도 아프다. 요즘은 집에서 혼자 뜨개질하고 책 읽고 글 쓰는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 싸우느라 그 시간을 포기하는 게 아깝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런 건 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애초에 싸울 일도 없이 현자에 가까운 멘탈을 갖추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싸움을 피하는데에 유용한 사고의 단계가 하나 늘었을 뿐. 예를 들어 우리는 둘 다 기분이 나쁠 때 서로의 말꼬리를 잡는 습관이 있는데, 이제는 꼬투리가 눈 앞에 훤히 보여도 잠시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저걸 덥석 물어서 대판 싸움의 시동을 걸 것인가? 근데 그렇게 해서 나한테 남는게 뭐가 있지?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꼬투리 때문에 싸웠던 오조 오억번의 순간들이 지나간다. 아, 부질없다. 지렁이가 걸린 낚시바늘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휘이 지나치는 물고기처럼, 수명을 하루라도 늘리려 화를 덜 내기로 선택한다. 거기에 걸려들지 않는게 서로에게 좋다. 그래서 그냥 그 말을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무시하고, 약 3초에서 10초 가량의 정적을 유지한 다음, 무해하고 중립적인 주제로 넘어간다(예: 지난번에 먹었던 요거트 중에서 무슨 맛이 더 맛있었냐). 그럼 R은 그 소재를 바로 받아 대화를 이어간다. 내가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꼬투리를 띡 던졌을 때에도 R은 (왠만해선) 똑같이 반응해준다. 단 한 번도 이 규칙을 입 밖으로 내 본 적도 없는데 암묵적으로 정착됐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평화. 벨게 물 밖에 없다면 뽑으려던 칼도 집어넣게 만드는, 마법같은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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