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군산이랑 별 상관 없는 전남친 이야기 등
    사람 2021. 11. 22. 01:35

    R의 생일을 기념해 군산으로 일박 이일을 다녀왔다. 맛집과 관광지가 쫙 정리된 내 지도앱을 보더니 언제 다녀온 적 있냐고 해서 그냥 그렇다고만 했다. 전남친 문제로 투닥거릴 시기는 지났지만 그래도 굳이 말해서 무얼 하나 싶어서. 분명 2년 가까이 만났던 사람인데 그 놈이 나의 연애사에 미친 영향보다 차라리 이 사람을 만난 덕분에 여행지 코스가 미리 준비되었다는 효용이 더 크다. 헤어질 때에도 크게 미련이 없어서 내게 준 것들을 정리하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되게 실용적인 것들이라 그냥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명의 빨랫감도 거뜬히 소화해주는 건조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이패드, 그리고 2017년에 한 번 재미로 코인 투자해보라며 내게 쥐어준 10만원. (지금은 30만원이 되었네!) 억소리나는 부잣집 출신 치고 평소 씀씀이는 당시 학생이었던 나보다도 못해서 호적이 파인 건가 싶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나름 필요한 곳에는 써줘서 고맙네.

    그래서 걔랑 군산에서 뭘 했더라. 일단 같이 갔던 걸로 추정되는 모텔이 지도 즐겨찾기에 떡하니 박혀있어서 조용히 삭제했고, 식당들을 돌아보니 대충 어떤 곳이었고 내 평가가 어땠는지 기억도 난다. 음… 근데 걔랑 무슨 얘기를 나눴고 뭐 때문에 즐거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하도 자주 헤어지고 다시 만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재회했다는 얘기를 하는 것도 포기하고 만날 때라 그런가, 어디에 자랑하지도 않았고 또 자랑할 만한 즐거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얘 말고 나름 그 시절에는 내 인생에 진짜 큰 지분을 차지했고 내 인생을 들었다 놓으면서 두 짝으로 박살낸 것 같이 느껴졌던 사람들과도 연애할 때 정확히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렇다기엔 R을 만난 지 이제 겨우 2년이 지난 수준인데. 뭐랄까, 내가 요즘 R과 공유하는 삶은 각자 돌아갈 집이 있는 상태에서 했던 연애와는 너무 달라서, 분명 애정은 있지만 한 10년은 푹 삭힌 것 같은 그런 진득함 한 스푼에 비자와 취업과 적금과 통장 쪼개기와 희생과 인내와 언어적 장벽이 한 데 어우러져 비벼진 좀 서글픈 맛이랄까. 가끔 연애하는 친구들 상담을 들어주거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오글거리는 커플 인생네컷 같은 걸 마주치면 이게 이런 느낌이었나? 싶으면서 기시감이 든다. 불같이 타오르는 열정, 집착과 구속, 애정을 갈구하거나 혹은 감정이 짜게 식어가며 느껴지는 절망, 미련 등. 뭔가 그걸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차원을 건넌 걸까…

    확실한 건 R이 내 인생을 집어던져 박살낼 것 같지는 않다는 거다. 그 믿음에서 오는 단단한 안정감이 이 관계를 조금은 서글프게도 하지만 또 차분하게 따뜻하게도 만들어준다. 그런 사람과 보낸 군산에서의 일박 이일은 썩 재밌었다.

    R이 이 포스팅을 볼 수도 있어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훈훈한 마무리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아하는 걸 마냥 좋아할 수는 없어  (0) 2021.12.19
    물을 벨 거면 칼을 왜 뽑겠어  (0) 2021.05.09
Designed by Tistory.